신경에 숨어든 시간, 대상포진 백신이 지켜낸 기억... 치매 예방 효과 입증돼


신경은 시간의 저장고다. 우리가 살아오며 쌓아 올린 기억과 감정, 기쁨과 상처가 그 가느다란 길 위에 새겨진다. 그런데 그 신경의 깊은 곳에, 너무도 오래 잠들어 있던 존재가 있다. 어린 시절 수두의 얼굴로 들어와 평생 신경절에 숨어 지내는 대상포진 바이러스다.

이 바이러스는 조용하다. 면역이 강할 때는 침묵하지만, 인생이 지치고 몸이 약해진 어느 날, 척추 신경을 따라 한쪽 몸에 띠처럼 나타난다. 수포와 통증은 겉으로 드러나지만, 그 진짜 흔적은 신경 안에 남는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질문이 이어졌다. 이 침묵의 바이러스가, 기억의 병인 치매와 무관할 수 있는가.

최근 옥스퍼드대학교 연구진은 50세 이상 미국인 1억 명의 삶을 약 9년간 추적하며 그 질문에 답했다. 대상포진을 두 번 이상 겪은 이들은 한 번만 앓은 이들보다 치매 발생 위험이 더 높았다. 신경에 남은 상처가, 결국 기억의 균열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그러나 이 연구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남겼다. 대상포진 백신은 발병을 줄였을 뿐 아니라, 치매 발생 위험도 27~30% 낮추었다. 두 차례 접종은 더 단단한 보호막이 되었고, 그 효과는 1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백신은 고통을 막는 동시에 기억을 지키는 조용한 약속이었다.

대상포진 바이러스는 단순헤르페스바이러스를 깨워 치매를 부르는 단백질들을 늘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에 대처하는 백신은 신경을 지키는 선택이자, 사라져가는 시간을 붙드는 결단이다. 통증과 망각을 함께 예방하는 일, 그것이 의학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낭만적인 지혜일지도 모른다.


TheGraceHer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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