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라도 시인 정재학’이란 이름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걸 많이 보게 된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 말고는 출신지가 이름 앞에 수식어로 붙는 시인이 없었는데, 굳이 ‘전라도 시인’임을 강조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프로필에 따르면, 정재학 시인은 전북 고창 출신으로 조선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전라도 지역을 전전하며 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전라도의 언어로 오늘의 시간을 긁어내는 시인, 정재학은 이 나라가 어디를 향해 기울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의 문장은 격정적이되 계산되어 있고, 과장처럼 보이되 끝내 비유로 돌아온다. 그는 지금의 체제가 단지 한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라고 말한다. 법과 자유의 방향이 아니라, 붉은 나침반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숙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단언한다. 대한민국은 이제 “고개를 들지 말고 살아야 하는 법”을 익혀가고 있다고. 그는 이를 체념의 언어로 바꿔 말한다. “받들어 모시며 살면 된다.” 이 문장은 복종을 미덕처럼 포장한 시대의 자화상이다. 시인은 그것을 “원망하지 말라”는 말로 요약한다. 그 말은 스스로 선택했으니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말이다.
시인은 중국을 직접 찬양하는 문장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중국에 유리한 선택이 반복되는 구조 자체가 찬양의 언어라고 말한다. 그에게 찬양은 노래가 아니라 정책의 방향이다. 그는 묻는다. 왜 유독 중국 앞에서는 말이 낮아지는가. 왜 국가의 안전과 산업의 기준이 ‘관계’라는 이름으로 조정되는가. 그의 비유 속에서 중국은 불량한 품질을 감수해서라도 모셔야 할 존재, 경제와 일상을 침투해도 문제 삼지 않는 상전으로 그려진다.
이 모든 흐름의 한가운데, 시인은 다시 ‘불씨’를 꺼내 든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살아 있는 기억, 살아 있는 증언. 그 불씨가 꺼지지 않는 한, 과정의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의심한다. 지금 벌어지는 모든 과잉과 집요함이 과연 법의 이름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가. 혹시 누군가의 생존이 아니라, 누군가의 안심을 위해 불씨를 제거하려는 것은 아닌가.
종교와 언론에 대한 그의 애도도 여기서 이어진다. 자유를 말해온 신앙은 분류의 대상이 되고, 질문을 던지던 언론은 침묵을 학습한다. 그는 이것을 “자비와 사랑이 자유를 낳았던 역사와의 단절”이라 부른다. 북한과 중국을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 침묵하는 사회에서, 신앙과 언론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이 에세이는 한 시인의 경고를 기록한다. 나라가 무너질 때는 총성이 아니라 방향이 먼저 바뀐다. 불씨를 끄면 밤은 조용해질지 모른다. 그러나 어둠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TheGraceHer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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